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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적당한 날씨 속에 열린 밀라노패션위크. 날씨 탓이었을까, 유독 가볍고 다채로운 쇼들을 보고 있자니 벌써 봄이 온 것만 같았다. 데뷔 쇼 이후 저마다의 언어를 조금씩 선명하게 그려가는 디자이너들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웠지만, 이번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쇼를 보다 문득문득 스쳐 가는 이미지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하나씩 적어 둔 것. 그건 미술관에서 본 그림이기도 했고, 밀라노 거리에서 마주친 풍경이기도 했고, 어린 시절 소꿉놀이 한 장면이기도 했다. 그렇게 모아 둔 잔상들을 옷 옆에 나란히 놓아 보니, 디자이너는 모르는 에디터 마음대로의 영감 노트가 완성됐다. 밀라노패션위크 속 숨은 그림 찾기, 아래에서 천천히 만나 보자.

ANDREA ROSEN GALLERY
SHUTTERSTOCK
TESA / BUFFALOAKG
DARK HORSE ENTERTAINMENT / SANRIO

ANDREA ROSEN GALLERY

©LAUNCHMETRICS/SPOTLIGHT

프라다가 이번 시즌 꺼내 든 화두는 단 하나, 스커트였다. 미우치아 프라다와 라프 시몬스는 가장 보편적인 이 옷을 오브제로 삼아 집요하게 변주했고, 투명한 바닥 아래로 조명이 흐르는 쇼장은 마치 거대한 라이트박스나 복사기 위를 걷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그 위를 지나간 63벌의 스커트는 저마다 다른 얼굴이었는데, 흐린 하늘색 셔츠 아래로 흘러내리는 에메랄드 스커트를 보는 순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볼프강 틸만스의 사진 <I don’t want to get over you>(2000)가 떠올랐다. 가방과 슈즈에 더해진 펀칭 디테일도 흥미로웠는데, 구멍이 줄지어 뚫린 회색 펌프스에서는 옛 천공 카드가 겹쳐 보였다. 스커트를 돋보이게 하려 간결하게 덜어낸 톱은 은빛 덕트 테이프를, 흰 스커트 옆선을 가르는 라임색 벨크로 패널은 흰 공간에 홀로 선 앤 트루잇의 미니멀리즘 기둥 조각 <다마스크>(1980)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쇼 후반, 검정으로 윤곽을 붓질한 듯 테두리를 두른 라임과 핑크 레더 셋업을 보며 영화 <마스크> 속 짐 캐리의 초록 가면과 쿠로미가 떠올랐던 건 나뿐 일까.

GALERIE PERROTIN
DANIELE LEVIS PELUSI
BRUN FINE ART /  PACE GALLERY

GALERIE PERRO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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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가모의 막시밀리안 데이비스는 이번 시즌 리 밀러가 이집트에서 남긴 사진과 1940년대 유니폼에서 출발했다. 당시 세상을 누비며 스스로 이미지의 주인이 되고자 했던 여성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만큼, 허리를 강조하듯 두 줄씩 겹쳐 맨 벨트가 컬렉션 곳곳에 반복됐다. 그중 흰 리넨 재킷 사이로 검은 새틴 톱이 길게 떨어지는 룩을 보자 자연스럽게 이배의 <붓질> 연작이 떠올랐다. 흰 화면 위를 한 번에 그어 내린 듯한 검은 숯먹의 획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중반부에 등장한 물빛 라텍스 룩은 이번 밀라노 출장에서 들렀던 무덱 박물관의 유리 아트리움을 떠올리게 했다. 이번 시즌에는 주름진 실크 소재도 유독 눈에 띄었는데, 올리브 컬러의 원피스는 모델이 움질일 때마다 촘촘한 주름 사이로 빛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반복되는 선과 리듬. 이곳에서 아르투로 베르미의 <일기>(1962), 그리고 몸의 움직임을 따라 선의 흔적을 남긴 이건용의 <바디스케이프 76-1-2021>이 차례로 떠올랐다.

 HENI EDITIONS
PEP HERRERO
SOTHEBY'S PARIS

HENI EDI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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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밀라노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쇼는 보테가 베네타다. 루이스 트로터의 세 번째 컬렉션은 밀라노에서 보낸 시간이 쌓여서인지 지난 시즌보다 확실히 가볍고 여유로워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옷까지 단순해진 건 아니다. 오히려 레이스와 크로셰, 프린지처럼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은 더 풍성해졌다. 쇼가 끝난 뒤 트로터가 “크래프트가 곧 우리의 로고”라고 말했는데, 옷을 보고 나면 그 말이 꽤 직관적으로 이해된다. 실을 엮어 길게 늘어뜨린 프린지 드레스에서는 리히터의 <케이지 4>(2006)가, 흰 크로셰 사이로 붉은 실이 얽힌 룩에서는 시오타 치하루의 작업이 바로 떠올랐다. 잘게 흩날리는 섬유 조각으로 뒤덮인 톱은 마크 토비의 <가을의 불>(1965)과 거의 흡사했다. 쇼를 보는 내내 전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나온 기분이었달까.

PIERVINCENZO RINALDI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THE BROAD / KNW
MERCADOLIBRE

PIERVINCENZO RINAL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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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장으로 가는 길, 차창 너머로 피아찰레 카도르나의 <바늘, 실, 매듭>(2000)를 봤다. 이는 클래스 올덴버그와 쿠셰 반 브뤼헌이 밀라노의 근면함과 패션에 바치는 오마주로 만든 거대한 바늘과 실, 매듭이다. 그런데 몇 시간 뒤 그 매듭을 모스키노 쇼에서 다시 만났다. 써네이를 이끌던 시모네 리초와 로리스 메시나의 모스키노 데뷔 쇼. 쇼장은 밀라노 외곽 주차 빌딩 옥상이었고, 해 질 무렵 모델들 사이로 평범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강아지와 아이, 자전거를 데리고 반대 방향으로 걸어 다녔다. 룩 자체는 다소 힘을 뺀 느낌이었지만 컬러와 위트만큼은 확실했다. 유독 체크가 많았는데, 노랑과 초록 체크 재킷은 초록 건물에 노란 불이 켜진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새우는 사람들>(1942) 같았다. 흰 바탕에 노랑과 빨강 그리고 파랑 선이 교차하는 재킷은 몬드리안의 <뉴욕 시티 I>(1942) 그대로였다. 거기에 쨍한 파란 구두의 발목 매듭은 풍선을 꼬아 만든 제프 쿤스의 <풍선 개>. 그리고 알록달록한 매듭 대신 초록 가죽으로만 묶은 매듭은 초록 장난감 병정이 생각나서 웃음이 났다.

MIKE BIDEN
GETTY IMAGES
NGA / VERPAN

MIKE BI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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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라이브로 지켜본 메릴 로게의 마르니. 이번 컬렉션을 보면서 다시 한번 느낀 건, 정말 색과 레이어드를 가지고 노는 솜씨는 이미 고수의 경지라는 것. 폴카 도트에 스트라이프를 겹치고, 오버사이즈 버클로 허리를 조이고, 일부러 조금씩 틀린 비율로 옷을 입히는데 그게 또 묘하게 멋있었다. 이번 쇼에서는 유독 동글동글한 요소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크고 작은 원형 스팽글이 촘촘히 박힌 스커트는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의 스포티드 레이크와 닮았다. 이곳은 여름이면 물이 마르면서 수백 개의 광물 웅덩이가 점처럼 드러나는 호수다. 세 번째 룩인 오렌지 튜브톱과 베이지 스커트에서는 컬러만 보고도 마크 로스코의 <오렌지와 노랑>(1956)가 먼저 떠올랐다. 여기에 커다란 버클로 허리를 잇고 가운데를 동그랗게 비워낸 모양은 베르너 판톤의 <VP 글로브> 조명과도 묘하게 겹쳐졌다. 하늘색 스커트 위에 투명한 원형 디스크를 붙인 룩에서는 무색투명한 몸을 가진 보름달물해파리가 생각나기도 했다. 세포 같기도 하고, 멀리서 내려다본 풍경 같기도 하고. 하나의 이미지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이 계속 겹쳐지는 게 어쩌면 이번 마르니, 아니 메릴 로게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기도 했다.

CENTRE POMPIDOU
PARTYBALLOONQ
BOYUKSA

CENTRE POMPID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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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진 종이로 만든 쇼장 입구와 바닥 여기저기 흩어진 컨페티 조각들. MSGM 쇼장에 들어서자마자 오늘 좀 신나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쇼 막바지에 진짜 펑 하고 컨페티가 터져 제대로 놀랐다. 사실 옷부터 이미 색종이와 별, 폭죽으로 가득한 파티였다. 타이다이 스트라이프로 문을 열고, 파란 야자수 프린트 티셔츠에 보라색 미니스커트를 매치한 룩은 그 자체로 앙리 마티스의 컷아웃 <폴리네시아, 하늘>(1946) 한 장 같았다. 짙고 옅은 파랑 사이로 흰 새와 해초가 떠다니는 그 경쾌함이 그대로 옷으로 옮겨온 듯했다. 한 번 분위기를 끊어준 검은 수트도 재미있었다. 라펠과 옆선을 따라 하늘색이 드러나는 모습은 검정과 파랑 양면 색종이를 접어 만든 옷 같았고, 알록달록한 시퀸 스커트는 가벼운 컨페티를 한데 쓸어 모아 붙인 것처럼 보였다. 공간부터 피날레까 모든 것이 축제였던 MSGM 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