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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은 또 다른 시작이 되고, 지나온 시간은 새로운 형태로 되돌아온다. 실리카겔이 정규 3집 [Ballad of You]와 함께 다시 한번 껍질을 벗었다. 이들이 직접 만든 단어 ‘나선탈각’처럼, 이번 변화는 과거를 지우고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일이 아니다. 익숙한 궤도를 돌면서도 조금씩 깊어지고, 지나온 음악을 기록으로 남겨둔 채 다음 모습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가깝다.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에서 출발한 윤회와 순환의 감각, 통일신라의 피리만파식적‘, 그리고 변형·입자·공허를 연상시키는 언어가 12개의 트랙 안에서 낯설면서도 또 조화롭게 교차한다. 37 동안 펼쳐지는 [Ballad of You] 흔히 떠올리는 느린 음악의 장르가 아닌, 실리카겔이 이야기를 남기는 새로운 방식이다. 진지함과 유머, 과거의 흔적과 미래의 가능성을 동시에 품은 이전과 같은 다른 소리로 되돌아온 . “그래서 발라드는 아닙니다. 하지만 발라드 오브 유입니다“, 돌고 돌아 다시 <아이즈매거진> 찾은 한주, 춘추, 웅희, 건재와 이번 생의 실리카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ㅣ이번 앨범의 컨셉을 기반으로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실리카겔: 안녕하세요. 윤회와 함께 다시 돌아온 실리카겔, 한주, 춘추, 웅희, 건재입니다. 돌고 돌아 <아이즈매거진>입니다. 이번 생도 잘 부탁드립니다.

 

ㅣ[Ballad of You] 어떤 앨범인가요?

실리카겔: [Ballad of You]는 실리카겔의 정규 3집입니다. 흔히들 알고 있으신 그런 발라드 앨범은 아닙니다만, 저희에게 ‘Ballad’는 느린 음악의 장르명이라기보다 이야기를 남기는 방식에 조금 더 가까웠어요. 그래서 발라드는 아닙니다. 하지만 발라드 오브 유입니다.

ㅣ’나선탈각’이라는 단어를 새롭게 만드셨다고 들었습니다.

실리카겔: 맞습니다. ‘순환’이라는 개념을 생각하다 보니, 겉으로는 계속 도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조금씩 파고들거나 깊이가 생기는 나선의 이미지가 떠올랐어요. 거기에 껍질을 벗고 변화한다는 ‘탈각’의 이미지를 붙여 ‘나선탈각’이라는 말을 만들게 됐어요. 이미 있는 단어 중에서 정확히 마음에 드는 것을 찾기보다, 저희가 필요로 하는 이미지를 설명할 말이 없다면 하나 만들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습니다.


ㅣ이번 앨범에서 말하는 윤회를 통한 ‘탈각’은 실리카겔의 이전 모습을 벗어나는 과정일까요?​

실리카겔: ‘탈각’이라고 해서 이전의 모습을 부정하거나 완전히 벗어버린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아요. 허물을 벗어도 그 허물은 한동안 그 자리에 남아 있듯이, 저희가 지나온 음악이나 시간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록으로 남아 있잖아요. 이번 앨범에서는 그것들을 버리기보다 다시 더듬어보고, 기억하면서 조금 다른 형태로 나아가는 과정을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희에게 탈각은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라기보다, 과거를 남겨둔 채 다음 모습으로 이동하는 것에 더 가까울 것 같습니다.

ㅣ조금 더 직설적인 질문을 드리자면, 지금의 실리카겔 그룹의 이미지를 만들어준 사이키델릭한 무드를 내려두고, 벗어나고자 한 이유가 있을까요?

실리카겔: 의식적으로 사이키델릭한 요소를 내려놓거나 벗어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번 앨범에도 그런 감각이 꽤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사이키델릭을 표현하는 방식이 이전과 조금 달라진 것 같아요. 특정한 음색이나 질감보다는 반복되는 연주, 공간의 변화, 익숙한 소리가 조금씩 낯설어지는 과정 같은 것에 더 관심을 뒀습니다. 그래서 어떤 모습을 벗어났다기보다는, 저희가 원래 가지고 있던 성분들을 다른 비율과 방식으로 사용해본 것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ㅣ메인 모티브로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인 <불새>를 선택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작품의 어떤 장면이나 사상이 이번 앨범의 출발점이 됐나요.

실리카겔: <불새>에서 흥미로웠던 건 ‘윤회’를 하나의 끝없는 반복이라기보다, 계속 형태를 바꾸며 이어지는 흐름처럼 바라본다는 점이었어요. 저희도 이번 앨범을 만들면서 사라진 것이 완전히 없어지는 게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는 순간들을 많이 생각했거든요. 과거의 경험이 지금의 음악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하나의 감정이 전혀 다른 형태로 남기도 하고요. <불새>의 세계관을 그대로 가져왔다기보다는, 그 안의 ‘순환한다’는 감각이 이번 앨범을 생각하는 하나의 계기가 됐습니다. 

ㅣ데즈카 오사무의 작품 <불새>와 통일신라 시대의 피리 ‘만파식적’, 꽤나 다른 배경이지만 비슷한 지점이 있는데요. 소재는 어떤 과정으로 연결되었나요?

실리카겔: 사실 두 소재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불새>는 이번 앨범에서 ‘윤회’와 ‘순환’을 생각하게 만든 하나의 모티브였고, 만파식적은 그와는 별개의 경로에서 들어온 이미지에 가깝습니다. 저희는 하나의 앨범을 만들 때 모든 요소가 반드시 같은 뿌리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서로 다른 시대와 맥락에서 온 이미지들이 한 작업 안에 함께 놓였을 때 생기는 낯선 조합 자체를 흥미롭게 보는 편이에요. 그래서 두 소재 사이에 명확한 연결고리가 있다기보다, 이번 앨범이라는 공간 안에서 우연히 서로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ㅣ 앨범의 12곡과 커버 속 12명의 인물은 서로 대응할까요? 각 위치별 인물이 하나의 곡이나 삶, 윤회의 단계를 담고 있을지요.

실리카겔: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하하 12명의 인물을 12개의 트랙 수에 맞춘 것은 맞지만, 각각의 위치와 인물이 특정 곡이나 삶의 단계에 정확히 대응하는지에 대해서는 저희가 하나의 정답을 정해두지는 않았습니다. 그 부분은 이번 디자인을 함께 만들어준 CAM의 태헌 군에게 조금 더 세세한 해답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저희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 수도 있고요.


ㅣ’애플 Today at Apple’과 펜타포트에서 최초 공개한 ‘Accident’는 앨범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더불어, ‘Dr. BOB’부터 ‘Accident’까지는 어떤 윤회적 궤도가 존재할까요?

실리카겔: ‘Melatonin 88mg’과 ‘Accident’에 각각 아주 세세한 의미를 부여해 먼저 공개한 것은 아니에요. 당시 펜타포트와 Today at Apple이라는 서로 다른 자리에서, 그 공간과 상황에 잘 어울리면서 저희가 보여드리고 싶은 모습을 잘 전달할 수 있는 곡을 골랐습니다. 앨범 전체에 하나의 명확한 ‘윤회적 궤도’가 있다고 설명하기도 조금 어려운 것 같아요. 한 곡이나 하나의 이야기로 설명할 수 있었다면 아마 앨범을 만들지 않았을 테니까요. 각자의 방식과 시간으로 마음대로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Accident’에서 끝난 뒤 다시 ‘Dr. BOB’으로 돌아가 들어보면 발견할 수 있는 작은 순환의 장치는 있습니다. 그건 직접 들어보시면 금방 발견하실 것 같습니다.


 ㅣ이번 앨범의 뮤직비디오에도 최웅희 감독님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나요?

실리카겔: 노코멘트하겠습니다. 다만 분명 엄청난 것이 나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기대하셔도 좋고, 안 하셔도 좋습니다.

 

ㅣ’Metamorphosing’, ‘Up Quark’, ‘BIG VOID’처럼 변형·입자·공허를 연상시키는 제목들이 이어져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비과학적이라고 볼 수 있는 동양의 윤회 사상이 중점적으로 역할하는 앨범에 과학적 언어를 같이 담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실리카겔: 재미있는 해석인 것 같네요. 다만 저희가 ‘윤회’와 ‘과학’을 의식적으로 대비시키기 위해 이런 제목들을 붙인 것은 아니에요. ‘Metamorphosing’, ‘Up Quark’, ‘BIG VOID’ 모두 데모를 만들고 정리하던 당시의 이미지나 감각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름을 붙인 곡들입니다. 공허 같은 이미지는 원래부터 저희가 자주 좋아하고 다루던 것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각자의 이유로 만들어진 이름들이 한 앨범 안에 모이고 나니, 말씀하신 것처럼 과학적인 언어와 윤회라는 개념이 함께 있는 모습으로도 읽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새로운 관계가 생기는 것도 앨범을 만들고 난 뒤 발견하게 되는 재미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ㅣ총 12곡에 37분이라는 러닝타임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인지요.

실리카겔: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는 처음부터 의도한 러닝타임이었어요. 초기 회의 단계에서 “조금 짧은가?” 하고 한두 번 다시 보기는 했는데,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들어본 뒤에는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로 자연스럽게 의견이 모였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늘이기보다는, 지금의 길이가 이 앨범에는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어요.

ㅣ’Dr. BOB’에서는 거대한 앨범 세계관과 ‘탈모 예방’이라는 일상적인 소재가 함께 등장합니다. 진지함과 유머는 이번 앨범에서 어떤 역할을 하나요? (‘Molecular Gastronomy’ 뮤비도 너무 재밌게 봤습니다.)

실리카겔: 30대 남성들로서의 다큐멘터리입니다. 농담이에요. 농담일까요? 노코멘트하겠습니다. ‘Dr. BOB’의 작업에서는 무엇보다 재미있는 발상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어요. 저희는 진지함과 유머가 생각보다 크게 다른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둘 다 어떤 순간을 오래 들여다보고, 적당한 때에 정확하게 꺼내는 감각이 필요한 일이니까요. 늘 진지하게 칼을 갈아둔 사람만이 필요할 때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듯, 유머도 비슷한 것 같아요. 평소에 충분히 생각해두지 않으면 결정적인 순간에는 잘 나오지 않으니까요.

 

ㅣ이번 앨범을 만들며 네 멤버가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지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과정이 수록곡의 변화로도 이어졌다면 어떤 곡인지 궁금합니다. 

실리카겔: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눈 건 결국 어떤 곡을 이번 앨범에 넣고, 어떤 곡은 다음으로 보낼지에 대한 부분이었던 것 같아요. 곡을 써놓고 “이건 4집으로 보내자”라고 하기도 하고, 반대로 예전에 만들었던 데모를 다시 꺼내 “이건 3집에 가져오자”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두 곡 사이를 이어줄 무언가가 필요해서 “그럼 이걸 하나 빨리 만들자” 하고 새로운 곡이 생기기도 했고요. 그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이미 4집에 들어갈 만한 데모들도 꽤 많이 쌓여 있습니다. 특정한 한 곡이 크게 변했다기보다는, 계속 이야기를 나누면서 앨범 전체의 경계와 순서를 만들어간 것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참고로 앨범 발매가 아니어도 원래 이런 이야기를 배달메뉴 정하는 것 다다음 쯤으로 많이 나누는 편이에요.

 

ㅣ각자 가장 심장이 뛰고 뜨겁게 몰두했던 곡이 있었나요?

한주: ‘Manphasickzuck’, 여러모로 찬란한 소리들을 한 곡 안에 많이 머금게 하고 싶었어요. 서로 다른 소리들이 한꺼번에 나타나면서도 하나의 큰 이미지로 들리게 만드는 과정에 가장 오래 몰두했던 것 같아요.

춘추: ‘Molecular Gastronomy’, 귀엽고 단단한 앙상블이 마음에 들어요. 네 명의 연주가 서로 작은 자리를 잘 찾아가면서 하나의 곡으로 움직이는 느낌이 좋고, 실제로 연주할 때도 굉장히 즐겁습니다.

웅희: ‘Melatonin 88mg’, 베이스의 폭렬 구간이 나올 때마다 두근거렸어요. 그리고 어렵습니다. 어려워서 더 몰두했던 것 같아요.

건재: ‘You Just Wanna Have Fun’, 재밌게도 드럼 연주가 들어가지 않은 곡인데, 앨범을 준비하면서 아마 가장 많이 들었던 곡 중 하나예요. 그냥 제가 참 좋아하는 소리들이 들어 있어, 듣고 있으면 이런저런 연주와 아이디어를 계속 얹어보고 싶어져서요.

ㅣ앨범을 제작하며 가장 재밌었던 비하인드가 있었다면 말씀주세요.

실리카겔: 설명드리기 어려울 정도로 정말 많은 일이 있었는데, 녹음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즈음 한주가 이펙터를 춘추의 맥북 위에 떨어뜨린 일이 기억나요. 그 맥북에는 작업 데이터가 전부 들어 있었어요. 당시에는 정말 끔찍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이상하게도 가장 웃긴 순간 중 하나가 된 것 같네요.

 

ㅣ이번 9월 26일과 27일 예정된 서울 공연에서 기존과 달라지는 점이 있을까요? 미리 <아이즈매거진>에서만 스포일러를 부탁드립니다!

실리카겔: 실리카겔에게 단독공연은 늘 하나의 분기점을 만드는 큰 사건이었어요. 이번 공연은 저희 커리어에서 가장 큰 규모인 만큼,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전과 달라지는 점도 분명 많을 것 같아요. 스포일러를 하나 드리자면, 9월 26일과 27일에는 만파식적에 휘감기실 수 있습니다.

ㅣ아시아투어는 또 어떤 다른 점이 있을까요? 모두 곳이 기대되시겠죠.​ 어려우시더라도 각자 가장 기대되는 곳이 있으시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주: 새로운 도시에서 저희를 처음 보게 될 분들과, 이미 오래 기다려준 분들을 직접 만나는 일이 가장 기대돼요. 공연을 통해 저희가 지금 어떤 모습인지 잘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공연이 끝난 뒤 그 도시에서만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음식들도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춘추: 장소와 환경이 계속 달라지는 투어에서, 그때마다 가장 좋은 공연을 만들기 위해 함께 고민하게 될 멤버들과 크루가 가장 기대돼요.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도 결국 하나의 팀으로 좋은 퀄리티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을 것 같아요.

웅희: 저는 투어의 모든 과정을 멤버들과 함께 겪는 시간이 기대돼요. 이동하고, 공연하고, 예상하지 못한 일들을 같이 해결하면서 생기는 기억들이 분명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공연이 끝난 뒤 아무 걱정 없이 멤버들과 크루, 관계자분들과 함께 먹는 맛있는 저녁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건재: 여행할 때마다 그 나라의 마그넷이나 작은 물건들을 모으는 취미가 있어서, 이번에도 각 도시에서 뭘 가져오게 될지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식을 좋아해요. 호텔 조식은 나라와 도시마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꽤 중요한 일정이거든요.

 

ㅣ이후 실리카겔은 어디로 향할까요?

실리카겔: 당분간은 [Ballad of You]와 함께 지구를 조금 더 돌아다니고 싶어요. 이번 앨범을 여러 도시와 사람들 앞에서 직접 연주하고, 그 과정에서 또 새로운 기억들을 많이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여지없이 4집을 향해 가야겠죠. 이미 데모들도 꽤 쌓여 있으니까요. 하하.

 

ㅣ마지막으로, 이걸 보고 있을 팬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실리카겔: 식사는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Ballad of You]는 들어보셨는지도 궁금해요. 크게든 작게든, 늘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시간되시는 분들은 9월 26일과 27일 체조경기장 공연에 오셔서 함께 윤회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