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으로 말을 거는 시인, 에스 데블린 인터뷰
Editor Comment
전시를 하나의 시로, 작가는 그 시를 쓰는 시인으로 바라보는 푸투라 서울의 새로운 전시가 시작되었다. 세 번째 시를 관람객들에게 선사할 이는 바로 영국 출신의 아티스트 에스 데블린(Es Devlin). 무대와 설치, 조각은 물론이거니와 영상과 드로잉 등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자신만의 시각적 세계를 공간으로 확장해 온 그녀는 단순히 내로라하는 아티스트의 무대를 디자인한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사람이다.
푸투라 서울에서 진행되는 전시를 통해 그녀는 관객으로 하여금 공간 속에서 함께 호흡하며 시적인 감상을 나누게 만든다. 자신을 넘어 타인을 비롯한 인간은 물론 모든 생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명징하게 느끼게 만드는 아티스트인 에스 데블린과 대화를 나눴다. 하나의 시처럼 오랜 시간을 곱씹게 만든 답변을 전해온 그녀의 첫 국내 개인전은 내년 1월 17일까지 푸투라 서울에서 개최되니 놓치지 말기를.
기간 | 2026.08.20 - 2027.01.17
장소 | 서울 종로구 북촌로 61 푸투라 서울
INTERVIEW
| <아이즈매거진>과는 첫 만남입니다. 이 인터뷰를 볼 이들에게 자신만의 문장으로 자신과 자신의 작업 세계를 소개해 주세요.
제 이름은 에스 데블린입니다. 저는 무대 조형을 만드는 작가입니다. 저는 언제나 관객에게 가장 분명하게 말을 거는 조형, 가장 시적인 소통의 도구를 만들고자 합니다. 제가 말하는 ‘시적’이라는 것은 언어가 가장 응축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노랫말처럼, 그 자리에 있는 사람 각자의 시선을 통해 하나씩 풀리고 해석되는 시적인 수수께끼와도 같습니다.
| 한국에서 열리는 첫 대규모 개인전입니다. 푸투라 서울에서 전시가 진행되는데, 혹시 공간적인 이유로 이 곳을 꼽은 걸까요? 만약 그렇다면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궁금합니다.
이번 전시를 처음 상상하기 시작한 것은 2024년, 푸투라 서울 구다회 대표와 함께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였습니다. 서로 스며드는 공간들을 따라 걷다 보니, 하나의 서사가 제 머릿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여러 차례 이곳을 찾으며 이 건축의 문법을 조금씩 익혀왔습니다. 제 남편은 건물이 공사 중이던 때부터 이곳을 방문했기에, 저 역시 건축의 표면 아래 숨겨진 구조와 결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 관객에게 처음으로 제 작업을 선보이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이 건축은 유기적이고 유려한 형태와 직선적인 형태가 공존합니다. 이는 도시와 자연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을 닮아 있으며, 이번 작업 역시 그 감각에 직접 응답합니다. 마치 하나의 악기가 음을 연주하듯 빛을 받아들이고 흘려보낸달까요. 앞선 두 편의 시에서는 투사된 빛을 사용했기에 창과 천창을 어둡게 유지해야 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처음으로 자연광과 작품이 서로를 비추고 반응하는 모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건축은 전시의 또 하나의 주인공이자, 또 하나의 등장인물이 됩니다.
푸투라 서울의 모든 전시는 하나의 시로 구상됩니다. 저 역시 그 연작의 세 번째 시를 써 내려간다는 마음으로 이번 전시를 구상했습니다. 공간이 하나에서 다음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듯, 전시 또한 서로를 비추며 하나의 연속성을 이룹니다. 각각의 전시는 공간과 관객이 자기 자신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하는 하나의 렌즈가 됩니다.
| 실험 오페라부터 대형 콘서트, 올림픽 폐막식의 무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무대를 디자인했습니다. 모든 무대가 다 소중한 작품이지만, 유독 기억에 남았던 무대가 있다면.
특히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를 하나 꼽자면, 작품의 형태를 결정한 것이 아이디어는 물론 주어진 조건과 제약이었던 2017년 브레겐츠 페스티벌의 비제 오페라 <카르멘> 수상 무대입니다.

| 이유도 들어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카르멘의 두 손이 오스트리아 부근에 위치한 콘스탄스 호수(혹은 보덴 호수) 위로 솟아올라 카드 한 벌을 공중으로 흩뿌리고, 그 카드들이 물과 하늘 사이에 떠 있는 장면을 상상했습니다. 순간의 몸짓에 불과했던 그 장면을 오스트리아의 겨울을 두 번이나 견뎌낼 수 있는 구조물로 구현해야 했습니다. 그 환영을 가능하게 한 대부분의 요소는 관객의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대 뒤에는 방대한 무게추와 구조 프레임, 지지 장치가 숨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 개인적으로 밴드 U2와 협업해 라스베이거스에서 선보인 설치 작업을 가장 좋아합니다. 이 작업이 멸종위기종을 주제로 했던 것처럼 평소 자신의 문제의식과 작업을 연계해서 선보이고 있는데, 요즘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무엇인가요?
지난 10여 년간 저는 이러한 질문을 품은 대규모 설치 작업을 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대륙에서 선보여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지역과 문화를 넘어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나의 의식을 경험하고자 하는 갈망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 갈망이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으로서 우리를 서로 연결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 공간/무대를 디자인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제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협업자 중 하나는 공간 그 자체입니다. 냄비의 물을 끓이려면 때로는 뚜껑을 덮어야 하듯, 공간 역시 저마다의 집중을 이끌어내는 압력과 형태를 필요로 합니다. 저는 공간을 하나의 존재로 바라봅니다. 저 역시 하나의 존재이고요. 그래서 사물과 공간을 언제나 사람을 대하듯 마주합니다.
| 모든 아티스트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영감은 어디서 주로 얻는 편인가요?
모든 프로젝트는 이전 프로젝트가 끝난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저는 언제나 직전 작업이 만들어준 시선을 통해 다음 작업을 바라봅니다. 제 작업 세계는 그렇게 하나씩 축적되어 갑니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마칠 때마다 제 관점은 조금씩 달라지고, 그 새로운 시선은 다시 다음 작업의 출발점이 됩니다.
| 보통 하나의 작업을 할 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지 궁금합니다. 전반적인 작업 과정도요.
스튜디오에서는 끊임없는 반복 속에서 실물 모형을 만들고, 드로잉을 하고, 리허설을 거듭합니다. 형태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같은 과정을 계속 반복합니다. 저는 젊은 디자이너들에게도 반복이야말로 작업을 더욱 명확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준다고 자주 이야기합니다.
이 과정은 우리가 하는 모든 작업의 바탕이 됩니다. 디자인은 어느 날 번개처럼 찾아오는 천재적인 영감이 아닙니다. 바이올린의 음계를 연습하듯, 매일의 반복을 통해 조금씩 완성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한 단어, 혹은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저는 조애나 메이시(Joanna Macy)의 책 <세계를 연인으로, 세계를 나 자신으로(World as Lover, World as Self)>에서 이 문장을 처음 만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서로에게 속해 있는 우리의 본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자아와 타자, 인간과 지구 사이의 경계가 서로에게 열려 있다는 이 가르침을 관객이 몸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전하고자 합니다.
| 자신의 예술 세계를 설명함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여러 개여도 괜찮습니다.
많은 프로젝트는 언제나 하나의 원초적인 주제에 대한 응답으로 시작됩니다. 때로는 이미 존재하는 대본이나 리브레토, 노랫말이 출발점이 되고, 때로는 사전 조사를 바탕으로 제가 직접 한 편의 시를 쓰기도 합니다.
저는 시간과 빛을 재료 삼아 조각합니다. 관객이 작품 안에서 보내는 시간, 그들이 마주하는 빛, 물질 속에 축적된 지질학적 시간, 그리고 제가 다루는 모든 물질을 만들고 형태를 빚는 데 들인 시간까지, 이 모든 것이 제 작업의 재료입니다. 아서 C. 클라크(Arthur C. Clarke)는 “충분히 발전한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기술과 환영을 통해 관객의 기대를 흔들고, 선입견이 아닌 자신의 감각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도록 초대하고자 합니다.
| 수많은 공간들을 하나의 서사적 환경으로 바꿔왔고, 그곳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모두 작품을 완성하는 하나의 존재이자 같은 감각을 공유합니다. 물론 감상은 자유로운 영역이지만, 이 전시를 보는 사람들이 하나쯤은 공유했으면 하는 느낌이 있을까요?
‘현존(Presence)’입니다. 저는 관객이 이 건축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며 이곳을 떠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작품과의 만남을 통해 자기 자신 또한 새로운 시선으로 마주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 이번 전시 후에는 어떤 목표가 있나요?
다음 프로젝트는 2026년 10월 런던 디자인 뮤지엄에서 개막하는 <Other Worlds>입니다. 이 전시는 2023년 뉴욕 쿠퍼 휴잇 스미스소니언 디자인 뮤지엄에서 선보인 첫 회고전을 바탕으로, 새로운 작업을 더하고 훨씬 높은 층고를 가진 디자인 뮤지엄의 공간에 맞춰 규모와 경험을 한층 확장한 전시가 될 것 같습니다.
| 아티스트로서 가지고 있는 궁극적인 목표가 궁금합니다.
저는 늘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기적인지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매일 제게 주어진 이 삶이라는 선물에 걸맞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제 의식을 통해 우주가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말이에요.
| 이번 전시는 푸투라 서울의 기획 프로그램인 ‘백 개의 시’ 중 세 번째 시입니다. 시적인 한 문장으로 이 전시를 집약한다면? 시처럼 말하거나, 떠오르는 시를 인용해도 좋습니다.
처음에는 공기가 푸르고
이내 더 푸르러지고, 다시 초록이 되었다가
마침내 검어진다. 나는 의식을 잃어가지만
내 마스크는 여전히 강인하다.
그것은 내 몸에 힘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바다는 또 다른 이야기다.
바다는 힘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홀로 배워야 한다.
깊은 물속에서
힘을 쓰지 않고도
내 몸을 돌리는 법을.
-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Diving into the Wreck)>, 197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