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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가 길어질수록 관계는 안정되지만 동시에 ‘익숙함’이라는 벽에 부딪히기도 한다. 특히 섹스는 그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드러내는 영역이다. 그렇다면 오래 만난 커플들은 매번 비슷하게 흘러가는 순간 속에서 어떤 변주로 다시 설렘을 만들어낼까.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가능한 솔직함, 그리고 솔직함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시도들. 실제 장기연애 커플들의 경험을 통해 힌트를 들어봤다. 어쩌면 그 미묘한 간극이 관계를 더 오래, 더 깊게 이어주는 이유일지도.

환경을 바꾼다
연애 4년 5개월 차 K
IMDB

연인이 자취를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모텔 대신 집이 우리의 공간이 됐다. 몇 년이 지나니 어느 순간 동선이 정해지더라. 침대, 침대 옆 의자, 가끔은 같이 씻는 욕실까지. 익숙함은 편하지만 동시에 패턴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TV를 보다가 우연히 본 장면이 계기가 됐다. 별다른 계획도 없이 우리는 그 길로 차를 몰았다. 해가 막 떨어진 어둑한 저녁, 좁은 차 안에서 느껴지는 숨소리와 긴장감은 지금도 선명하다. 누군가 볼지도 모른다는 상황이 오히려 감각을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사소하지만 웃겼던 건, 그 공간이 금방 습기로 가득 찼다는 것. 그날 이후로 우리는 환경이 얼마나 큰 변수가 되는지 알게 됐다.

같이 시청한다
연애 6년 9개월 차 G
SUMMIT ENTERTAINMENT

기념일이 점점 무뎌질 즈음 2,000일을 맞아 호텔을 예약했다. 근사한 식사와 와인, 그리고 늘 그렇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익숙한 흐름. 특별한 날인만큼, 그날만큼은 조금 다르게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함께 성인 영상을 봤다. 혼자 있을 때만 보던 걸 누군가와 공유한다는 게 생각보다 더 민망했다. 괜히 손으로 눈을 가리다가도 그 틈 사이로 자꾸 시선이 따라갔다. 어색함과 호기심이 묘하게 뒤섞인 순간, 분위기는 조금씩 달라졌다. 말 한마디, 작은 반응 하나에도 더 솔직해졌고, 평소보다 망설임도 줄어들었다. 돌이켜보면 그날의 자극은 영상 자체보다 그것을 함께 본 이후에 흐르던 공기였지 않을까.

도구를 사용한다
연애 6년 2개월 차 M
UNIVERSAL PICTURES

키스로 시작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루틴. 문득 ‘오늘은 조금 다르게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함께 성인용품점에 들어갔다. 입구에서부터 괜히 눈치를 보게 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면 생각보다 담담한 분위기다. 낯설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물건들 사이에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몇 가지를 골랐다. 그중 하나가 러브젤이었다.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막상 사용해 보니 익숙했던 감각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단순한 촉감의 변화일 뿐인데도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지는 느낌. 함께 새로운 시도를 해봤다는 그 경험 자체가 그날을 더욱 색다르게 만들어준 것 같다.

공부한다
연애 5년 1개월 차 C
ELEMENT PICTURES

첫 연애 상대가 지금의 연인이라 모든 게 처음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익숙해졌고, 그 익숙함이 때로는 무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시작한 게 ‘공부’였다. 서로 유튜브로 체위나 방법에 대해 찾아보고, 웃어가면서 하나씩 시도해 봤다. 생각보다 진지하기보다는 중간중간 웃음이 터지는 순간들이 더 많았다. 그런데 그 과정 자체가 관계를 새롭게 만들더라. 무엇보다 달라진 건 대화였다. 평소에는 쉽게 꺼내지 못했던 취향이나 감각에 대해 말해보는 것. 가볍게 농담처럼 시작했지만 장기연애라서 가능한 솔직함이 결국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코스튬을 해본다
연애 8년 3개월 차 H
AMERICAN ZOETROPE

8년 가까이 만나면서 국내외 여행도 많이 다녔다. 그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건 일본 여행이었다. 기념품을 고르다 우연히 들어간 돈키호테의 19금 코너. 평소라면 쉽게 지나쳤을 공간인데, 해외라는 이유 때문인지 괜히 더 대담해졌다. 가벼운 장난처럼 코스튬을 하나 골랐고, 그날 밤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알코올을 곁들인 술기운도 있었겠지만 가끔은 그런 작은 역할놀이 같은 게 관계에 예상치 못한 활력을 줄 지도.

안한다
연애 7년 6개월 차 J
WARNER BROS. PICTURES

흔히 말하는 ‘의무감으로 하는 관계’. 어느 순간부터는 한 달에 한 번 할까 말까 한 빈도가 됐다. 그렇다고 해서 관계가 나빠진 건 아니다. 섹스가 사랑의 척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오히려 낮에 함께 웃고, 편하게 하루를 보내는 시간이 더 중요해졌다. 자연스럽게 몸의 거리는 조금 멀어졌지만, 감정의 거리는 여전히 가깝다. 어쩌면 이것도 장기연애의 한 형태일지 모른다. 중요한 건 횟수가 아니라, 서로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지가 아닐까. 문득 궁금해졌다. 상대도 같은 생각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