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NHAP NEWS

투표지가 동났다

투표지가 없어서 투표를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바로 어제 6월 3일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일, 서울 송파·강남·광진 투표소 14곳에서 투표지가 동났다. 수기로 적은 대기표가 발급됐고 투표 시간은 밤 10시까지 연장됐다. 줄을 서다 발길을 돌린 유권자들도 많았다. 투표를 하지 못한 국민들의 항의 영상이 SNS를 통해 빠르게 퍼졌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지방선거 특성상 투표율이 100%에 이르지 않는 점을 고려해 직전 지방선거인 2022년 투표율에 맞춰 유권자 대비 약 50% 분량의 투표지만 인쇄했다. 그런데 이번 선거의 실제 투표율이 예상을 훨씬 웃돌면서 용지가 동이 났다.

선관위 관계자는 “투표율이 예년 지방선거보다 높아 문제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번 지방선거 당일 오후 5시 기준 투표율은 57.4%로, 2022년 동시간대보다 9.8%포인트 높았다. 전국 14개 지역구 국회의원 재보궐선거가 동시 실시되면서 유권자들의 선거 관심이 높아졌고, 사전 투표율도 역대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예측 실패인지, 구조적 준비 부실인지를 놓고는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국민들은 높아진 사전 투표율 추세를 이미 선거 전 확인할 수 있었음에도 충분한 여유분을 확보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실패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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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지지 못한 투표함

첫 신호는 오후 1시께 송파구 잠실2동 제6투표소에서 왔다. 투표지가 부족해 유권자들이 대기에 들어갔다. 선관위는 인근 구청 선관위에서 투표용지를 긴급 이송했지만, 해당 지역 투표소 곳곳에서 같은 상황이 이어졌다. 오후 4시 30분부터는 일부 투표소에서 사실상 투표가 중단됐다. 잠실2동 투표소에서는 마감 한 시간 전에 용지가 바닥났다.

“평소와 달리 수십 명이 길게 줄을 서 있어 당황스러웠다. 국가의 중요한 선거 관리를 어떻게 이런 식으로 할 수 있느냐”

송파구 가락2동 투표소에서 대기한 뒤 투표를 마친 회사원 김모 씨

가장 극적인 상황은 잠실7동 제2투표소에서 벌어졌다. 선관위는 오후 6시 마감 전 대기표를 받은 유권자에 한해 투표 시간을 밤 10시까지 연장하는 초유의 조치를 내렸다. 오후 11시 50분 투표가 공식 종료됐지만,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보수 성향 유튜버들과 시민 수백 명이 투표소 입구를 봉쇄하면서 약 2,000표가 담긴 투표함 2개가 개표장으로 옮겨지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잠실7동 제2투표소와 관련한 112 신고만 135건. 경찰 기동대 470명이 투입됐지만 물리적 충돌을 우려한 서울시 선관위가 이송 강행을 포기하면서 대치는 4일 오전을 넘겨 오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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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계 입장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허철훈 사무총장은 긴급 브리핑을 열고 “투표용지 부족으로 국민 여러분께 큰 혼란과 심려를 끼쳐드렸다”며 공식 사과하면서도 이번 사태가 “공직선거법상 선거 연기나 재선거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개표 중단과 재선거 요구를 거부했다. 오늘 오후에는 “개표가 끝나는 대로 외부 전문가 중심의 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해 원인과 책임을 규명하겠다” 고 발표했다. 또 잠실7동 투표함 2개가 개표되지 않으면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 및 송파구 일부 선거구 당선을 공식 확정할 수 없다는 입장도 밝혔다.
  • 국민의힘
    정희용 선거대책본부장은 “2026년 대한민국의 투표 현장에서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충격적인 사건”이라며 강하게 규탄했다. 국민의힘 서울시당 배현진 위원장은 “민주주의 근간을 흔드는 사건이며 단순 실수가 아니라 선거 관리 기본 시스템 붕괴”라고 주장했다. 선관위 책임자 처벌을 계속 요구하며 진상규명위 구성을 촉구했다. 당 차원의 선거무효 소송은 사실상 포기하는 분위기지만, 일부 의원들은 개인 자격의 법적 대응 가능성을 열어뒀다.
  •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위원장은 “국민의 현명한 선택에 감사드리고 존중한다”면서도 “서울을 탈환하지 못해 아프다”고 밝혔다. 민주당 역시 선관위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납득할 수 없는 허점”이라며 책임 추궁을 예고했다. 야권에서도 선거무효 소송 가능성을 제기했으나, 오세훈 후보가 역전 당선됨에 따라 민주당 쪽의 소송 동기는 사실상 사라졌다.
  • 법조계·시민사회
    선거무효 소송이 실제 제기되더라도 “투표용지 부족으로 인한 참정권 침해가 당선 결과를 결정적으로 바꿀 수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 법조계 중론이다. 현행 공직선거법상 재선거 사유는 엄격하게 제한돼 있어, 이번 사태만으로 선거 효력 무효를 이끌어내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시민단체 서민민생대책위원회의 경찰 고발은 수사 착수 여부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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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선거 사상 초유의 사태

공직선거법 224조는 선거무효 판단의 요건을 ‘선거의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 인정하는 때’로 엄격히 한정하고 있다. 투표용지 부족으로 귀가한 유권자 수가 1·2위 후보 간 최종 표차보다 많아 당락을 좌우할 정도라는 점이 입증돼야 한다는 것이다.

4일 아침 출근 시간대에 잠실7동 제 2투표소 앞 시위대 규모가 한때 170명 수준으로 줄었으나, 오전 10시 30분께 다시 플라스틱 의자를 들고 앉는 장기 농성 태세로 전환했다. 오세훈 후보의 역전 당선이 사실상 확정된 뒤에도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정오 경찰 비공식 추산 약 350명이 집결한 상태였다.

오세훈 후보의 당선이 확정됐음에도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이들은 ‘투표결과 불복’이 아니라 ‘선거 방식 자체의 부정’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선관위가 예고한 외부 전문가 진상규명위원회가 원인과 책임자를 어디까지 밝혀낼지, 경찰 수사는 어떻게 이루어질지가 변수다. 잠실7동의 투표함 봉쇄는 증거 확보의 목적으로 계속되고 있다. 헌정사 초유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행정 실패 차원을 넘어, 선거 결과 불복과 부정선거 주장의 연료로 활용되는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개표 완료 이후 법적·정치적 후폭풍이 어떻게 전개될지가 이번 사태의 진짜 후반부다.